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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61. <부정공>기운(淇運)配 유인경주김씨묘갈명(孺人慶州金氏墓碣銘)
1. 문헌 목록 〉21. 21世 〉63. <부정공>병철(秉哲)配 유인창원정씨전(孺人昌原丁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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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부정공>병두(秉斗)配 유인전의이씨전(孺人全義李氏傳)
(부정공후)21世병두(秉斗)配 유인전의이씨전(孺人全義李氏傳) 孺人李氏貫全義石灘先生諱愼儀諡文貞后諱熙燮之女妣朗州崔氏哲宗甲寅九月十一日生于南平元積洞第家法固美淑資天成性度貞順夙講閨範之可則通敏女工之可習未笄己著茂德年二十歸玉川趙門夫君即 端廟忠臣節愍公諱崇文后諱善浩之子名秉斗也再喪配而第三聘也家因喪禍幾乎不振夫敬待以禮氏奉承以順事祖母與姑誠孝達於辭色問寒溫具甘旨志體俱養姑與祖母極稱其孝敬之至兄弟姊妹怡然和洽夫君又有副室俯仰無間衣食相資執役同苦閨門之内軓儀有秩序矣極其誠敬尊嫜安之盡其慈愛而卑幼懷之厚其撫恤婢僕戴之尤爲致誠於追遠每於忌日前期齋戒必務澡潔精肅以助奠具又於前二配之忌辰具備祭品莫不躬檢曰此吾盡誠處也務令豊潔漸至於家因而筮興族戚鄉隣嘖嘖其宜家之隆洽也生一男一女俱早夭強忍其悲慽之情而慰夫君哀矜之意晩生二男曰淇煥正煥也其父性嚴至於肆業未精則或施橽楚孺人亦加勉戒常恐其不及也夫君偶罹二竪之侵掠積年刀圭甞一日少懈行禱于神明求以身代一無差度竟至無何天年有定庚寅五月十九日臨終痛歎老母之救疾徹底乃囑後事於孺人曰老母在堂二孤雖幼幸二叔在焉使令備足則其於奉先裕後制產之道一一就正做得勿替家聲孺人服喪盡禮葬祭竭力自恐遺托之不效養姑孝敎子義俾免早孤怠愠之習副生二男曰成煥日煥也育之敎之一如己出外事則勗承二叔調護服役則分責奴婢周幹勤審奉祭接賓一遵遺規愿款二姊無盖底圓方之患至二叔調護窘乏少無難色復爲賑給溫飽共之一家之内並媤服僕御男女百餘口可謂爨同實有所受於湛樂之貽模以致先亭宗會施賞遺饋焉每年春秋窮節貧食人雖十往請糧升斗均施無一空還者遠近成服其慈善也衰齡居姑喪哀毀踰制蔬水遵禮君子以爲難百行之純於十德推而可象也二男長成娶婦入門孺人敎於其初來俾傳縫春之節惟於祭賓之外不親細事日以前後襟裾孫曾之幼彷徨中庭或往還于介子與闔宗之家以享康寧人皆艶羡而自切於晝哭之畢生痛恨也行年七十三以胃氣不平膳度漸損日深月積終作沈痼執淇煥手而言曰叵耐歲月遽此遲暮苦樂永忘今焉而己則汝須恪守先訓各盡其道千萬努力勿墜家聲言訖終世享年七十四丁卯正月二十五日距夫公沒三十八年葬于本面飛鎌山長口項上辛坐原嗚呼孺人溫良慈惠之德不讓於古之女士而實助啓趙門無彊之休也孫休警休照休三淇煥出休泰休一休暎正煥出六從昆季孝友敦睦見稱於世靈芝醴泉有源有根固其所也日休警携家狀一通而來言先祖妣生平行蹟固如此而若今不修永久湮滅則爲子孫之道當如何哉願君勿靳一言相之以叙吾積欝之懷余以非其人又不文固辭不獲強筆畧抄如右以竢立言君子之論評焉 歲彊圉作噩殿春下澣 族從 臻勲 謹書 (부정공후)21世병두(秉斗)配 유인전의이씨전(孺人全義李氏傳) 유인 全義 李氏는 석탄 선생 문정공 휘 愼儀의 후손인 熙燮의 따님이요 비는 朗州崔氏인데 哲宗 갑인년(一八五四) 九월 十一일에 南平 元積洞 집에서 태어났다. 집안 법도가 진실로 아름답고 맑은 바탕을 하늘에서 받아 성품과 도량이 곧고 순하며 일찍 부도의 가칙을 배우고 여공 익힐 것을 통달하여 비녀 꽂기 전에 이미 성한 덕이 나타나더니, 二十세에 옥천 조문에 출가하니 부군은 곧 단종(端宗)의 충신 절민공 휘 숭문(崇文)의 후인 휘 선호(善浩)의 아들 병두(秉斗)로 두 번 상배하고 三취하였다. 집안이 상변으로 인하여 거의 부진한 중에 부군을 예로써 경대하고 시부모를 정순으로 봉승하며 조모를 섬기어 지극한 효도가 말과 얼굴빛에 나타났으며, 따뜻한가를 묻고 좋은 반찬을 갖추어 뜻과 몸을 함께 봉양하니 시모 및 조모가 극히 그 효경의 지극함을 칭찬하고 형제자매가 기쁘게 화합하였다. 부군이 또 부실을 두었는데 거처에 사이가 없고 의식을 서로 도와 천역을 함께 노고하니 규문 안에 법도와 질서가 있었다. 그 지성과 공경을 다하니 시부모가 편안하고, 자애를 다하니 아랫사람이 사모하며 무휼을 후하게 하니 비복이 덕을 노래하였다. 더욱 선영에 치성하여 매양 제삿날이면 미리 재계하며 반드시 청결 정숙을 힘써 전 올릴 제구를 돕고 또 앞에 상처한 두 배위의 제사에 제수를 몸소 살펴 말하기를, 「여기가 나의 정성을 다할 곳이다.」 하면서 오직 풍족하고 정결한 것을 힘쓰니 점차 가도가 일어나니 족척 향당이 그 집안이 화순하고 융흡함을 큰소리로 칭송하였다. 一남一녀를 낳아 함께 요절하였으나 억지로 그 슬픈 마음을 참고 부군의 애긍한 뜻을 위로하였다. 만득으로 낳은 二남은 기환(淇煥), 정환(正煥)으로 그 아버지의 성품이 엄하여 하는 일이 정밀치 못하면 혹 매를 치니 유인이 또 훈계를 더하며 항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부군이 우연히 병마의 침범을 받았는데 여러 해 동안 치료에 일찍이 하루도 게으른 빛이 없고 신명에 빌어 몸으로 대신할 것을 원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차도가 없어 마침내 어쩔 수 없이 하늘이 정한 나이인 경인년 五월 十九일에 운명하면서 늙은 모친의 힘을 다하여 간호한 것을 통탄하며 뒷일을 유인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모친이 당에 계시고 두 고아가 비록 어리나 다행히 두 아저씨가 있고 비복이 건재한즉 그 선영을 받들고 자손을 복되게 하며 살림을 꾸려 나갈 도리를 일일이 바르게 하여 가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하였다. 유인이 상제가 되어 예를 다하고 장례와 제사에 힘을 다하여 스스로 부탁받은 유언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효도로 시모를 봉양하고 의리로 아들을 가르쳐서 일찍 고아가 되어 게으른 습성을 면하게 하였다. 부실에서 난 두 아들은 성환(成煥), 일환(日煥)인데 기르고 가르치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밖의 일은 두 숙부의 도움을 받아 힘써 이으며 천역은 비복에게 책임 지워 주선이 부지런하고 자상하였다. 봉제사 접빈객을 일일이 끼친 법도를 따르고 두 누이에게 관대하며 두 분 숙부를 돕는 궁핍에 조금도 어려운 빛이 없이 다시 구제하여 주어 따뜻하고 배부름을 함께하고, 한 집안 八촌 이하 친족과 비복 남녀 一백여 구가 한 솥에 밥을 먹는 것은 진실로 담락의 끼친 법을 받은 바 있어 선정 종회에 시상과 사찬을 베풀었다. 매년 봄, 가을 궁절에 가난한 사람 수천 명이 식량을 간청하면 되 곡식이거나 말 곡식이거나 고르게 나누어 주고 한 사람도 헛걸음은 아니 하게 하니 원근이 다 그 자선에 감복하였다. 노쇠한 나이에 시모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제를 넘고 채소와 수장으로 예제를 지키니 군자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백가지 행실이 십덕(十德)을 갖추어 순실하였음을 미루어 상상할 수 있다. 二남이 장성해서 며느리를 맞아들이자 유인이 그 처음 올 때 가르쳐 하여금 침선과 절구질의 절차를 전하고 오직 봉제사 접빈객 외에 세세한 일은 아는 체 않고 날로 앞뒤 옷깃을 잡은 어린 손자 증손자를 데리고 정원에서 노닐며 혹 많은 아들과 여러 종친의 집을 왕래하면서 강녕을 누리니 사람이 다 부러워하였으나 스스로 군자 잃은 것을 일생 통한하였다. 향년 七十三세에 위병을 얻어 식성이 점차 덜리더니 끝내 고질이 되었는데 기환(淇煥)의 손을 잡고 일러 말하기를,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 어느덧 저물어 고락을 길이 잊으니 이제는 끝났다. 너는 모름지기 선훈을 정성껏 지켜 각기 그 도리를 다하고 천만 노력하여 가성을 떨어뜨리지 말게 하라.』 하고는 부군이 별세한 후 三十八년인 정묘(丁卯)년 一월 二十五일에 향년 七十四세로 고종하니 본면 비겸산 장구목 위 신좌언덕에 장사하였다. 아! 유인의 온량 자혜한 덕은 옛적 역사들보다 못하지 않고 진실로 우리 조 씨 집안 무강의 아름다움을 도와 계발하였다. 손자 휴경(休警), 휴조(休照), 휴삼(休三)은 기환 소생이요, 휴태(休泰), 휴일(休一), 휴영(休暎)은 정환 소생인데 六종형제가 효우 돈목하여 세상이 칭송하니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이 다 뿌리가 있고 근원이 있는 것이 진실로 그 소이연이로다. 하루는 휴경이 가장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말하되, 「선조비 평생 행적이 이와 같은데 만일 이제 기록 아니 하고 영구히 산실하면 자손 된 도리에 어떠하겠는가? 원컨대 그대는 한마디 말을 아끼지 말고 도와서 나의 답답한 생각을 펴게 하라.」 하였다. 내가 합당한 사람이 아니요 또 글을 못하므로 굳이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강연히 붓을 잡고 이상과 같이 대략 초하여서 후세에 말을 남길 군자의 논평을 기다리기로 한다. 족종(族從) 봉훈(琫勳보)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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